여자는 ‘집’보다 ‘길’을 좋아한다.
정정엽 개인전 ≪여자는 길을 좋아한다≫는 2021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개최한 ≪걷는 달≫ 전시의 일부를 동양장 B1과 동양장 윈도우 공간에 맞추어 구성한 전시다. ≪걷는 달≫은 정정엽의 작업 중 여성의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 인물을 그린 작품들로 구성한 전시로 여러 시기에 걸쳐 제작한 다양한 인물을 그린 작품을 전시했다.¹ ≪여자는 길을 좋아한다≫는 그중 작가가 최근에 작업한 여성의 몸짓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는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삼종지도(三從之道),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칠거지악(七去之惡)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에게 귀속된 존재로 여겼으며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와 같은 말로 여자의 주체적인 삶을 부정해왔다. 여성에 대한 인식은 변화하고 있지만 오랜 유교적 전통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히 남아있다. 결혼한 남자가 그 부인을 지칭할 때 흔히 ‘집사람’이라는 단어를 쓴다. '집사람'은 남자는 집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 안에서 일한다는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집 밖’에서 일하는 경우에도 구분 없이 사용하곤 한다. 전시 제목에서 ‘길’은 이렇게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규정하는 ‘집’이라는 단어와 대립한다.
정정엽은 이전에 ‘집사람’으로 사는 여성의 실존을 다룬 바 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취업공고판 앞에 서 있는 결혼한 여성을 그린 < 집사람 >(1991), 두 손 가득 장을 봐서 들고 가는 여성 군상을 그린 < 식사 준비 >(1995), 비치는 천에 여성의 실루엣을 그려 겹쳐 걸어 놓은 작업을 했던 < 집사람 >시리즈(2000~2018) 등이 있다. 정정엽은 이 같은 작업에서 ‘집사람’의 당당하고 주체적인 모습을 그렸다.
‘집’을 떠나 ‘길’을 나선 이들의 몸짓은 더욱더 주체적이며 한껏 자유롭다. 작품 속 인물은 배경과 분리되지 않은 듯 조화를 이루며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미술관에서 카페에서 바닷가에서 그리고 빗속을 행진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 평범한 모습에 시선을 주고 공감하는 태도는 여성의 삶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오랜 성찰의 작업이며 동시에 동시대를 사는 여성에 대한 작가가 연대하는 방식이다. 정정엽은 전시 도록 『걷는 달』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여성의 삶은 길 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범(典範)이 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지거나 특별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여성이 걷는 길이라는 것이다.
정정엽은 일찍이 비판적 시각을 장착하고 노동운동과 미술운동을 통해 약자의 편에 서서 모순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 여정에는 ‘여성’이 존재해 왔고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자기 내면으로부터 출발한 시선 그 자체다. ≪여자는 길을 좋아한다≫에 전시된 작품은 작가의 눈에 비친 여성이지만 동시에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 작업을 바라보는 관객의 모습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정정엽이 그린 길을 떠난 여자를 그린 그림들은 집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이 잠시 머무는 곳인 ‘동양장’ 전시 공간에 전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있기를 바란다.
글 ㅣ 강성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1 정정엽 개인전 ≪걷는 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의 말미에 정필주가 쓴 「‘우리’라는 공명의 순간으로 안내하는 정정엽의 인물화」, 『월간미술』 p.147.와 장윤주가 쓴 「분홍이 겹겹 팥죽」, 『동무비평 삼사』 2021. 11. 28 https://review34.kr/112 를 재수록했다.